유럽의 긍정심리학은 ‘탈정치적 심리학’으로 존재
유럽 심리학은 오래도록 구조와 원리, 기제와 이론의 공간이었다. 정신분석, 행동주의, 인지주의. 모두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였지만, 그 도구들 사이엔 감정이 끼어들 자리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아주 서서히, 아주 다르게 긍정심리학이 유럽의 심리학을 흔들고 있다. 나는 50대의 여성 임상심리사로서, 그 변화의 흐름을 정리하지 않고 ‘느끼며’ 적는다. 논문이 아닌,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한다. 이건 이론이 아니라, 심리학과 감정이 만나는 풍경의 기록이다. 유럽 심리학은 빠르지 않다. 그곳은 ‘낭만’보다 ‘논리’를 중시하고, ‘실험’보다 ‘철학’을 신뢰한다. 융의 상징적 무의식도, 프로이트의 억압된 욕망도, 모두 ‘이유 있는 혼돈’을 추구했던 방식이었다. 긍정심리학은 그 틈에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너무 밝고, 너무 실용적이며, 너무 미국적이었다. '행복'이란 단어조차 어딘가 경박하다고 느껴질 만큼, 유럽은 정서보다는 해석, 감정보다는 담론, 경험보다는 개념을 사랑하는 대륙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긍정심리학은 비주류였다. "행복이 학문이 될 수 있나요?" "긍정정서가 어떻게 삶의 해답이 될 수 있죠?" 하지만 지금, 그 질문이 다시 던져지고 있다. "그래도, 우리가 왜 이렇게 불행한 건지는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요?" 긍정심리학이 유럽에 퍼지기 시작한 계기 중 하나는 정치, 사회, 경제 시스템으로부터 독립된 감정 회복의 모델로서의 기능 때문이다. 프랑스, 스페인, 독일, 벨기에… 많은 유럽 국가들은 이민, 실업, 고립, 노화 문제로 ‘삶의 질’보다 ‘생존의 질’을 말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럴 때 긍정심리학은 정치도, 종교도, 제도도 아닌 한 개인이 자신의 감정을 ‘다시 쓰는 기술’을 제시했다. 그건 교육이었고, 복지였고, 심리적 인프라였다. 명상 프로그램으로 채워진 고등학교 수업, 노인 대상의 감정 회복 트레이닝, 심리치료가 아닌 자기 회복성 워크숍이다. 유럽에서 긍정심리학은 "인생을 바꿔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 괜찮은 당신"을 확인하는 언어로 자라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움직임을 "학문이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이라 부른다.
유럽-이성의 대지에서 피어난 감정의 숲
미국의 긍정심리학이 ‘성과 중심’이라면, 유럽의 긍정심리학은 ‘비판 중심’이다. 유럽은 "그건 누구의 기준인가요?"라고 자주 묻는다. 유럽 심리학자들은 PERMA조차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쪼갰다. ‘Meaning은 문화적이지 않나?’ ‘Positive Emotion은 지속가능하지 않으면 해롭지 않나?’그리고 여기에 ‘존엄’(Dignity),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삶의 정치성’(Politics of Being)이 덧붙여졌다.긍정심리학이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질문이라면, 유럽은 "그것이 누구에게 유효한가?"를 계속 묻는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이 심리학을 더 사람답게 만든다고 믿는다.유럽의 긍정심리학은 ‘고요한 심리학’이다 – 감정은 커도 소리는 작다. 나는 독일에서 있었던 심리학 컨퍼런스에서 한 교수의 발표를 들었다. 그는 말했다. "행복은 개념이 아니라 감각입니다. 그리고 감각은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만, 옆에 머무를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유럽의 긍정심리학은 유명 유튜버의 슬로건이 아니고, 자기 계발의 구호도 아니다. 그건 조용히 정리된 상담실의 정물화고, 누군가의 감정 앞에 고개를 숙이는 학문이다. 그래서 유럽은 잘 웃지 않는다. 그러나 그곳엔 깊은 공감이 있다. 감정을 확대하지 않고, 그저 옆에 있어주는 방식으로 다룬다.
유럽식 긍정심리학에서 배운 것
나는 서른, 마흔, 쉰을 거쳐오며 ‘긍정’이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처음엔 그 말이 가식 같았다. 그다음엔 이상주의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럽의 방식은 달랐다. ‘긍정은 웃는 얼굴이 아니라, 버티고 있는 존재의 자세였다.’ 감정은 고치지 않고, 눈물은 숨기지 않고, 삶은 정답이 아니며, 심리학은 ‘존재’를 지지하는 기술이었다. 나는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상담사로서 유럽 심리학자들의 ‘느린 존중’에서 가장 따뜻한 긍정을 배웠다. 그건 정답이 아니라 머무는 감정이었다. 유럽은 심리학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언어’를 만들고 있다. 유럽 심리학에서 긍정심리학은 아직 ‘중심’은 아니다. 하지만 ‘귀 기울여 듣는 언어’로 자라고 있다. 나는 심리학이 점점 더 ‘조용한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조용함 속에서 긍정심리학은 "너, 괜찮아."라는 한 문장을 품게 될 것이다. 그 말이, 말로 끝나지 않고 눈빛과 자세와 기다림이 될 수 있다면, 그게 진짜 심리학일지도 모른다.